어려서부터 내 귀는 좋지 않았다. 누가 말을 하면 꼭 한 번은 네? 응? 이라고 되물을 정도로 귀가 나빴다.
사고가 난 건 아니고 그냥 선천적으로 나빴던 듯. 아니면 내가 기억 못하는 아주 어릴 적 문제가 있었을수도 있고.
눈이 잘 안보이면 실눈 뜨고 보고 시력이 나쁘면 안경을 끼듯 가는 귀로 대충 살다가 작년에 거금들여 보청기를 마련했다.
이럴수가! 보청기를 끼기 시작하니 세상이 너무 시끄럽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대화가 무척 잘 들려 안 그래도 시끄러운 내가 더 시끄러워졌다. 잘 들리는 대화에 더 열심히 참여하다 보니.
그리고 올해는 퇴사도 했다 싶어 장애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청력검사, 뇌간검사를 받고 서류를 모아 주민센터를 갔다.
나중에 국민연금공단에서 장애등록심사 자료보완내역서를 보내오기에, 추가로 자료 더 모아 제출했다.
그렇게 거의 2-3달여 만에 심하지 않은 장애 판정을 받았다. 나는 심각한 장애가 아니라 2년 마다 재검을 받아야한다.
복지카드는 나왔고 지금은 지하철 탈 때 무료로 타고 다닌다. 한 달 교통비가 7-8만원 나오니 꽤 절약이 된다.


장애진단 받는 것까진 주변에 거의 이야기를 안했다. 뭘 자랑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다니나 싶어서.
그리고 최근 집 근처 마트에 있는 정체불명의 기둥석을 첨으로 뚫어져라 봤는데, 귀에 대한 글이 쓰여 있었다.

잘난 인물의 생김새를 나타낼 때 ‘이목구비가 반듯하다’고 말한다. 왜 눈, 입, 코 다 놔두고 하필이면 귀를 앞에 세우는 것일까.
눈, 입, 코에 얼굴의 노른자위 땅(그런 게 있다면)을 내주고 그야말로 두 귀퉁이에 겨우 달라붙어 있는(그래서 귀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도) 귀의 ‘낮은 데로 임하는’ 자세를 어여삐 여겼음일까. 하기는 빠져 나오기는 눈, 코, 입, 귀가 같이였을 텐데, 생일을 눈빠진 날, 코빠진 날, 입빠진 날이 아니라 귀빠진 날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들 사이에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줄서기, 엄정한 서열 같은 것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귀는 겉귀와 속귀로 나뉘는데, 그 갈피를 이루는 것이 귀청이다. 청이란 어떤 물건에서 얇은 막으로 된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대나무의 안 벽에 붙은 얇고 흰 꺼풀을 대청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귀라고 생각하는 귀, 그러니까 ‘귀가 크다’고 할때의 귀는 귓바퀴를 말하는 것으로, 귓바퀴의 가장자리를 귓가나 귓전이라고 한다.
귓바퀴의 아래쪽으로 늘어진 살이 귓불이고, 귓불의 두께를 귓밥이라고 하는 것이다. 귓바퀴의 바깥쪽은 귓등인데, 그 반대쪽, 그러니까 귓구멍이 있는 쪽은 귓배라고 해야 옳을 것 같은데, 적어도 사전에는 그런 말도, 그에 해당하는 말도 없다. 등만 있고 배가 없는 괴물이 바로 귀인 것이다. 귓구멍의 밖으로 열린 쪽을 귓문이라고 하는데, 귓문 옆에 젖꼭지처럼 볼록나온 살은 귀젖이라고 한다. 사람의 몸에는 목젖과 귀젖, 그리고 진짜 젖, 이렇게 세 가지의 젖이 매달려 있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주의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흘려 듣는 것을 귀넘어듣는다, 귓전으로 듣는다고 하는데, 반대로 정신을 바짝 차려 주의 깊게듣는 것은 귀담아듣는다, 귀여겨듣는다고 한다. ‘눈여겨보다’와 통하는 말이다. 한 번 본 것이라도 눈여겨보고 곧 그대로 흉내를 잘 내는 재주를 눈썰미라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귀 여겨들어 한 번 들은 것을 그대로 흉내내는 재주는 귀썰미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좋은 소리나 마음에 담을 만한 이야기를 듣고 느끼는 맛을 귀맛이라고 하는데, 귀맛이 나는 소리, 옳고 바른 소리를 마음대로 실컷 듣고 싶을 때, ‘나는 몹시 귀가 고프다’고 말하면 된다. 배가 아니라 귀가 고픈 것이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뱃속이 비어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싶은 상태를 말한다. 귀가 고픈 것은 쓸데없는 소리, 거짓말, 헛소리, 소음 따위가 아니라 바르고 옳은 소리로 귀를 채우고 싶다는 뜻이다. 고프다는 것은 비어서 무엇인가를 채우고 싶다는 것, 그러므로 술고프다고 말하는 것은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말 자체로서는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차라리 술잔이 고프다고 말하는 쪽이 더 그럴 듯하다. "술 한 잔 따라 줄래"하는 것보다 "내 술잔이 고프구나"하는 쪽이 더 술맛을 돋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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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간 계속 있었던 장식물인데 최근에서야 발견한 건, 장애 판정을 받아 마음에 걸리는 이물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는 신의 뜻이 아닐까 한다.
귀에 대해서 이렇게 예쁜 글을 다 쓴 사람이 있다니,
잘 못 듣는다며 회사에선 타박듣고 거금 들어간 보청기에 빈궁하게 생활하고 어찌됐던 장애 판정에 쓰라렸던 속이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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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갈무리] 귀 이야기
우리말 갈무리 귀 이야기
www.chosun.com
1998년 7월 8일 조선일보 - 우리말 갈무리
귀(耳)빠진 날, 귀 이야기 - 서귀포신문
▲ 삽화/이왈종 화백 오늘은 내가 귀(耳 )빠진 날이다. 잘난 인물의 생김새를 나타낼 때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반듯하다’고 말한다.어째서 눈, 입, 코 다 놔두고 하필이면 귀(耳)를 앞에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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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9일 서귀포 신문 - 오피니언
위 글의 출처를 알고 싶어 구글에 검색해보니 원 저자는 안나오고 신문의 오피니언만 나온다. 조선일보 오피니언이 제일 오래됐는데 역시 작가 이름은 안나온다.
그런데 이상한 건 서귀포신문에서 위 글의 많은 문장을 덧붙인 오피니언을 올렸는데 인용문이 아니라 마치 오피니언 필자가 쓴 것처럼 글을 올렸다.
서귀포신문 외에도 여러 언론사에서 위 문장들이 꽤 있다. 스스로 썼건 아니면 청탁 받아 썼건 칼럼 필자들이 어떤 맘으로 위 문장들을 썼는지 궁금하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처럼 어린이도 알 정도의 인용문이면 모를까 이 정도 글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텐데, 적당히 본인이 쓴 글처럼 올려 새삼 놀랐다.
물론 나도 맨날 하는 짓(?)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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